역점의 시기
명리학은 고대 중국에서 주역에 의한 음양학설이 먼저 존재했다. 중국역사의 기원은 삼황오제로부터 시작되었고 이중에 복희 씨를 천황, 신농씨를 지황, 여화씨를 인황으로 불렀다. 복희 씨가 팔괘를 만들고 신농씨 등이 64괘를 나누었다고 전해진다. 주역은 복희 씨가 황하 강에서 머리는 용이고 몸은 말인 형상을 한 용마가 등에 짊어지고 나온 그림을 말한다. 머리는 용이고 몸은 말인 형상이 그림을 짊어지고 나오다니 화성에서 헬리콥터를 띄우는 시대에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나 서양에 그리스 로마 신화가 있고, 우리나라에 단군신화가 있듯, 고대 중국에는 용마라는 신화가 있었고 거기에는 역과 음양오행의 기원이 되는 실마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용마의 등에 실제 그 그림이 그려졌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 그림으로부터 역과 음양오행이 출발한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런 후에 황하에 나타난 용마의 등에 있는 그림의 형상을 보고 천문지리를 연구하고 만물의 변화를 살펴 선천팔괘를 만든 뒤, 후에 문왕이 육십사괘와 괘효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선천팔괘가 등장한 시기는 약 7천500년 전으로 보며, 후천괘가 나온 것은 3천 년 전으로 본다. 주역은 세 개의 효로 이루어진 소성괘와 두 개씩 어울려서 이루어지는 대성괘를 가지고 사인에 대한 길흉을 점치도록 되어 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으로 태양계의 영향을 받은 오행성으로 운명을 예측하는 오행학설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연, 월, 일, 시, 간지를 가지고 시간을 기록한 것은 동한(東漢) 순재(順宰) 서기 126년 이후의 일이다. 당나라말 송나라초 이허중 선생은 연주의 납음으로 운명을 판단하는 이론을 세웠다. 그의 저서는 이 허중명서이고, 또 그는 당사 주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자평의 시기
서자평선생은 연주 중심의 명리학을 일간 중심으로 판단하는 이론을 창안하여 완성했으며, 그 후 연해와 비결집 연원을 합본하여 연해자평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격국론과 시결론, 신살론등이 방대하게 수록되어 있고, 초학자가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으나 고전으로서 훌륭한 지침서 중 하나이다. 명나라 때는 많은 분들이 사주학의 뿌리를 튼튼하게 했는데, 장남선생은 명리정종을 저술하고 서자평선생이 지은 연해자평의 부족분을 보충했다. 그리고 만 육오 선생은 삼명통회를 저술했다. 무엇보다 명나라의 개국공신이던 유백온 선생은 명리학의 보서라 칭하는 적천수를 저술했다. 사주학, 자평명리학이 기틀을 잡고 꽃 피운 청대 초엽에 진소함 선생은 적천수 원본을 주해한 적천수집요를 저술하고 명리약언이라는 요점정리 책자를 남긴 분으로, 정승의 벼슬을 지냈다. 청나라 중엽의 심효첨 선생은 자평명서의 3대 보서인 자평진전을 저술하였다. 자평진전은 기초와 골격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졌고 간결하고 정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심효첨 선생은 건륭 4년에 진사에 급제한 인물이다. 다음으로 임철초 선생은 건륭 38년 4월 18일, 진시에 출생하여 73세 되는 1846년에 난해하게 생각했던 적천수에 임상을 거친 명료한 주석을 달아 명리학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적천수천 미을 저술한 분이다. 1935년 서락오 선생은 난강망이라는 책에 주석을 달아 궁통보감을 펴내고 적천수징의를 출간했는데, 적천수천미에서 진소암 선생의 주석 부분을 삭제한 것이다. 그 후 적천수보주라는 책을 편찬했으며 자평수언을 저술했다. 또 원수산 선생의 명리탐원, 명보는 다양한 이론과 실존인물의 사주를 집대성했고, 임철초 선생의 적천수천미를 찬집 했다. 근대에서는 위천리 선생의 명학강의와 팔자제요가 좋은 서적으로 꼽히며, 오준민 선생의 명리신론, 화제관주의 명학신의 와 하건충 선생의 팔자심리학등도 의미 있는 서적이다.
역학의 시원과 명인들
우리나라에서 주역에 대한 교육이 시작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태학이 세워지면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성균관에서 태조 7년에 주역을 가르쳤는데, 대학 1개월, 중용 2개월, 논어와 맹자를 각각 4개월을 가르친 데 비하여 주역을 7개월이나 가르쳤다. 이것은 우리의 조상이 주역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바로 이 주역에서 명리학이 탄생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우리의 명리학은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발맞추지 못하고 천시와 소외의 굴레에서 지탱되어 왔으나, 근래에 들어 저변확대와 함께 인간의 미래정보라는 커다란 가치성이 인식되면서 과학적 실용 학문으로서 확연히 인정받게 되었다. 20세기에는 서락오선생의 기존 서적인 자평진전을 재정립하여 자평진전평주를 편찬하였고 원수산은 유기와 임철초선생의 주석을 모아 적천수천미와 명보, 명리탐원을 저술하였으며 중국이 장개석을 대만의 국사로 모시고 주요 사건에 자문을 구했다고 하는 자평명리학계 거두 위천리는 팔자제요, 정선명리약언, 고고집등을 저술했다. 그러므로 역학의 명인들 역시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 도계 박재완선생은 위천리의 명학강의를 번역하여 명리요강의 이론서를 저술했고, 위천리의 팔자제요를 번역하여 일지론을 첨가한 후 명리사전을 만들어 한국 역학계의 발전에 기여한 공이 지대하다. 자강 이석영선생은 20년간의 연구를 통하여 사주첩경이라는 전 6권의 대작을 실전체험과 임상을 걸쳐 1969년에 완성함으로써 중국 서적에의 의존을 탈피하는 빛나는 공헌을 세웠고, 관인 한국 역리학원을 설립하여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근대 이후 한국 사주 명리학계의 큰 공헌을 새운 이석영 선생과 박재완 선생을 꼽을 수 있다.